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연경당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지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. 《궁궐지》에는 1828년([[순조]] 28년)으로 쓰여있는 반면, 《한경지략》과 《동국여지비고》에는 1827년(순조 27년)으로 적혀 있다. 건립 후 [[효명세자]]가 [[신하]]들을 접견하거나 진작례[* 進爵禮. [[신하]]들이 [[왕]]과 [[왕비]]에게 [[술]]과 [[음식]]을 올리기 위한 [[행사]].]를 거행했다. [[헌종(조선)|헌종]] 대 이후에는 [[익종]]으로 추존 된 효명세자의 [[어진]]과 모훈[* 謀訓. 뒷 [[임금]]에게 모범이 될 [[교훈]].]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([[철종(조선)|철종]] 8년)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[[초상화]]를 다른 곳으로 옮겨 오랫동안 빈 [[건물]]로 있었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xa_10304017_001|#]]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시기인 1865년(고종 2년) 새로 증축, 신축했으나 곧 [[경복궁]]이 중건되면서 한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. 이후 1884년(고종 21년) [[갑신정변]] 때 [[청나라]] 군대에 쫓긴 [[개화파]] 수뇌들이 고종을 데리고 이곳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고, 이외에도 고종과 순종이 [[외국]] [[공사]]를 접견하고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a_13105010_002|#]]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b_10104029_001|#]], 여러 [[잔치|연회]]를 베푸는 등 [[정치|정치적]] [[공간]]으로 사용했다. 특히 1895년 6월 6일에는 이곳에서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가든파티인 원유회가 개최되었다. [[일제강점기]]에도 순종이 이 곳에서 오찬을 열고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c_10404017_001|#]] 다과회를 여는 등 행사 장소로 활용되었으며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c_10504016_001|#]] 1917년 [[창덕궁 희정당]]과 [[창덕궁 대조전|대조전]] 등 [[내전]] [[건물]]이 전부 불타자 그 곳에 살던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]]과 [[순정효황후]]가 임시로 거처하기도 했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zc_11011010_001|#]]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. 다만 [[자동차]]의 출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[[창덕궁 애련정|애련정]] 일대의 [[창덕궁 의두합|의두합]]의 전면이 깎이고, 다른 후원 권역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[[문|출입문]]인 금마문(金馬門)이 개조되는 변화가 있었다.[[http://dh.aks.ac.kr/sillokwiki/index.php/연경당(演慶堂)|#]] 2012년 8월 [[대한민국의 보물/1601~1800호|보물 제1770호]]로 지정받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